제목: 주님이 없이 열매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문: 요한복음 15장 1절~17절
제목: 주님이 없이 열매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문: 요한복음 15장 1절~17절
제목: 성령을 보내신 이유
본문: 요한복음 14장 25절~31절
제목: ‘사랑’하는 자의 특징
본문: 요한복음 14장 1절~24절
제목: 사랑하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
본문: 요한복음 13장 31절~38절
제목: 나의 사랑의 대상을 분별하라!
본문: 요한복음 13장 21절~30절
믿음으로 행하지는 가짜들 #03
(성도인가? 양아치인가? / 상식에도 못미치는 믿음=망상적 자기 확신)
한 번쯤은 들어봄직한 말들이 있다. ‘저 사람은 교회 다니지 않아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보다 나아’, ‘교회 다니는 사람도 다 똑같아’.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조금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나보다. 물론 한국의 초대교회의 성도들, 정말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경험해본 비신자들은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르다라고 경험했을 것이고, 비신자들과는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비신자와 구분이 없어졌다. 교회를 다니던 다니지 않던 구분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아마 목회를 하고 있는 분들중에 내 교인도 아니고, 전혀 친분도 없는 사람들의 집에 방문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고작해야 내 교인의 집에 심방정도가 다 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심방이 아닌, 전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여러 사람들의 일상을 보게 되고, 어떻게 사는지, 평소 모습은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만약 나에게 만나는 사람들 중에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하라고 하면, 정말 구분하기 어렵다. 현관문달려 있는 문패에 ‘XX교회’, 혹은 집안 달력에 ‘XX교회’이렇게 증명하지 않는 이상, 이 사람이 신자인지 비신자인지 알아볼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일상 속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듯이 신자와 비신자 구분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집에 방문했을 때였다. 그 집에 살고 계신 분은 너무나도 크게 유튜브로 찬양을 틀어놨다. 집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찬양들이 많이 흘러나왔다. 그 찬양을 틀어놓으신 분을 보기 전에는 이 집은 기독교의 냄새가 났고, 믿는자의 집과 같이 보이는 ‘교회 달력’이며, ‘십자가 모양의 악세사리’며 여러가지 증거들이 많이 보였다. 그러나 정작 그 집의 주인을 만났을 때는 믿는 자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말투’와 ‘행동’으로 다져저 있었다.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과, ‘믿는 자처럼 살아가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보이는 모습은 교회에 다니고, 기독교인의 냄새가 나더라도, 결정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 칠한 무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외식’아니겠는가? 예쁘게 화장한 사람과 같이 겉으로는 ‘나이스하고, 믿음 좋아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클렌징을 하면, 화장에 가려졌는 민낯이 드러나듯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의 ‘믿음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다.
‘실제로 드러는 삶’의 모습이란, 자신이 결단하고 살아가고자하는 내재적인 의미보다는 실제로 상대에게 나타나는 행동을 이야기한다. 특히 ‘비정규직’이라던지, ‘사회적 약자’에게 대하는 매너만 엿보아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여기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Worker’ 나 ‘Helper’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내면 상태가 드러난다. 나의 삶 속에서 ‘직업’에 따라, ‘이력’에 따라, ‘나이, 인종, 국가’에따라 상대방의 대하는 태도에 차이를 보인다면, ‘믿음’은 둘째치고, 인간의 기본 수준에도 못미친다는 사실을 빨리 자각해야 한다. 이런 수준 이하의 태도와 생각을 가지고, 그 사람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위치로 간다면, 재앙과도 다를 바 없다.
수준이하의 매너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그보다 더 하나님께 누가 되고, 반영광이 되는 일이 있을까? 기본과 상실 이하의 수준을 가지고, ‘믿음의 삶’이니, ‘복음의 삶’이니 하는 모습을 주님이 보시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으실까?
‘양아치’라는 말은 원래 동냥아치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동냥하던 넝마주의나 거지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양아치라 함은 동네 ‘삼류 만도 못하는 깡패’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즉, 삼류라는 것은 겉모습만 그럴싸할 뿐이지, 실력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는 ‘깡패’처럼 보이려고 애쓸지라도, 진짜 깡패 조무래기라도 만나면, 바로 꼬리를 내리는 것이 양아치 아닌가?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괴롭히는 것이 바로 양아치 아니겠는가?
‘사회적 강자’ 앞에서는 존중과 매너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사회적 약자’ 앞에서는 치졸한 양아치로 드러나는 성도의 삶이란 결국 복음을 거꾸러뜨리는 ‘역증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발 상식만이라도 가진 성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상식이하의 수준으로 ‘믿음’을 제발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믿음을 이야기하지 전에, 꼭 상식과 기본에 준하는지 스스로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주님이 주신 복음과 믿음은 상식 이하의 수준이 아니다. 상식과 수준을 뛰어 넘는 것이 ‘믿음’이다. 억지와 고집이 ‘믿음’이 아니라, ‘복음’앞에 나의 억지와 고집을 기꺼이 모두 포기하는 것이 ‘믿음’이다. 나는 이런 ‘완전한 복음’앞에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많이 보여지기를 바랄 뿐이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만이 건강한 교회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망상적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망상적 자기 확신’의 쉬운 말은 ‘똥고집’이다. 똥고집은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허황된 생각에서, 이치에 맞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렇게 믿는 것이다.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에 의하여 정정되지 아니한 믿음이다. ‘나는 믿으니까 천국 간다.’, ‘나는 믿으니까 구원 받았다’, ‘교회 다니니까 믿는 것이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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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행해지는 가짜들 #04
(일을 하면, 예배 준비가 소홀해 진다고? / 목회자의 이중직 / 부캐를 원하지만, 할줄 아는 것이 없다… / N잡러에 관하여)
제목: 사랑하지 않고는 절대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본문: 요한복음 13장 1절~20절
제목: ‘사랑의 주님’과 ‘심판’의 관계
본문: 요한복음 12장 44절~50절
믿음으로 행해지는 가짜들 #02
(선교사인가? 선교지 마케터인가?)
‘선교사’라는 말처럼 모호한 말도 없다. 주님 나라를 위한 선교라면, 믿는자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선교적’이어야 한다. 선교사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복음대로 산다고 한다면, 당연히 은혜의 복음은 ‘선교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교사’라는 이름을 달고도 ‘선교’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행하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의 모든 선교사들을 싸잡아 평가절하 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만나보았던 ‘선교사’라는 이름을 달고, 어떤 일을 저질르고 있는지 그저 나누고 싶을 뿐이다.
물론 나의 글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절대 다수를 위한 글이 아니라, 우리 가온누리 교회 성도들을 위한 글일 뿐이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또한 앞으로 이 세계 어디든 복음들고 나아갈 때에 속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해 두는 것임을 미리 알려두는 바이다.
선교사들의 에피소드를 듣다가 보면, 정말 ‘주님이 하셨다!’라는 고백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 주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베풀어주신 그 선교 현장의 생생한 고백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에게는 ‘선교사의 간증’만큼 박진감 넘치는 신앙의 고백을 접하기란 흔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론 부분이다. ‘주님이 일하셨고, 주님께서 행하셨고, 불가능 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지를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사실 ‘기도해 달라’는 말은 선교지를 ‘후원’해 달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들릴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주님께서 행하여 나가신다는 확신을 가졌다면, ‘기도’나 ‘후원’은 사실 강조할 필요가 전혀 없다.
만약 기도를 구한다면,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구했던 그 중보면 충분하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9)
내 입술이 먹고 사는 걱정의 기도로 가득차고, 한숨과 신세 한탄이 아니라, 내가 선 곳에서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입을 열어 증거하게 해달라고 중보부탁하면 된다. 선교사가 할 일은 복음이 필요한 곳에 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선교사뿐이겠는가?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선교사나 목사나 전하는 것의 기본과 근본은 ‘복음’ 아니겠는가?
‘복음’이외의 것을 구한다면, 분명히 구별해내야 한다. 하나님이 돈 몇 푼에 일을 못하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고작 몇이 기도하고, 안 하고에 따라서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가? 값없이 은혜로 복음을 주신 하나님이 고작 후원금 때문에 일을 못하신다? 선교사의 사역이 돈 몇 푼에 이루어지고, 안이루어진다는 식의 결론을 맺는다면, 그것은 가짜다. 지난 은혜의 추억은 사실일런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과거일 뿐, 은혜의 경험은 지금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가 할 것은 ‘복음’증거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무언가’를 홍보하는 것이 아니다. 왕의 전령이 할 일은 ‘왕의 메시지’지를 정확히 전하면 되는 것이다. 전하기까지 걸어가던, 말을 타고 가던 상관이 없다. 왕이 명한대로 가서 전하기는 것으로 전령의 사명은 다하는 것이다. ‘가라고 하는 곳’으로 ‘정확히 가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전령의 사명이자, 선교사의 사명이다. 전하라고 명하신 분이, 하물며 가는 여건을 마련해 놓으시지 않으셨겠는가? 왕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전령이 앞에 무서운 것이 있겠는가? 왕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한 것이다. 왕의 명을 전하기 위해서는 말 한 필도 필요하고, 가는 길에 숙소도 필요하고, 먹을 것도 필요하다라고 이야기 한다면, 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의 반응은 결코 아니다. 왕의 명과 함께 즉각 순종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들과 복음전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주님 명령하시면, 준비고 뭐고, 즉각 순종 뿐이다. 경외함으로 주님 앞에서 서 본자만이 그 즉각 순종의 이유를 안다. 은혜의 복음 앞에 서 본자만이 ‘세치 혀로 전할 것은 복음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전함을 중보하는 기도’ 부탁 외에는 다른 것을 이야기 한다면, 분명히 구별해 내야 한다.
왜냐 주님이 나를 주님의 거룩한 사역에 함께 참여시켜주신다면, 꼭 그 선교사의 만남을 전제하지 않아도, 주님이 직접 나를 다루어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관계에 어떤 중매도 필요없다. 성령님 한 분이시면 충분하다. 내가 몰랐던 선교지의 소식을 선교사를 통해서 접하게 되고, 마음이 동하여 후원하게 된다면, 그 후원은 오래가지 못한다. 특히나 그 특정 지역 선교사의 좋지 못한 소식을 접하면, 후원하고 싶은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만약 선교지에 후원을 하고 싶다면, 주변 선교사나, 설교하러 오는 선교사를 찾지 말고, 직접 찾아 나설 필요가 있다. 주님이 일하실 때는 ‘복음’ 하나면 충분하기에, 어떠한 혈연과 지연, 학연, 인맥도 필요 없다.
그런의미에서 특히 주의할 것은 선교사와 담임 목사 혹은 교회와의 관계이다. 늘 후원은 출신교회 선교사, 혹은 관계가 있는 선교사이기에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교연(교회의 관계/기관후원), 성연(성도와의 관계/개인후원)아니면, 선교사로 살기 힘들다는 말을 버젓이 한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선교를 만난다면, 그냥 걸러내야한다. 그리고 자꾸 사진 같은 것 찍어서 밑에 온 가족 이름뒤에 선교사라고 붙여 놓고, 개인 후원계좌를 열어 놓았다? 이 또한 그냥 걸러내라. 한낱 인간의 후원이라고 해봤자, 전지전능한 하늘 아버지의 능력보다 크겠는가? 이미 종이 한장에서도 그 믿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어설프게 프레젠테이션이나 영상을 준비해서 설교 초반, 중반, 후반에 보여주는 자들을 주의해야 한다. 선교지는 믿는 자들이 나아가야할 곳이지, 구경하고 돈 몇푼 쥐어서 보내는 곳이 아니다. 선교지를 궁금하게 해서 선교지를 향한 소명을 품게 하는 선교사가 진짜 선교사다. 그는 동역자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교지에는 사실 복음 전할 사명자가 필요한 것이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물질이 필요하더라도, 들의 백합화도,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꼭 선교사의 영업을 통한 방법만을 사용하시지는 않는다.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영업해서 후원받아 어떤 일을 진행하는 것과 큰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준비하며, 주의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들과 함께 진행하는 것과 어떤 것이 더 성경적인지는 여러분들이 판단해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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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행하지는 가짜들 #03
(성도인가? 양아치인가? / 상식에도 못미치는 믿음=망상적 자기 확신)
제목: 이단보다 더 무서운 ‘행위이단’
본문: 요한복음 12장 36b절~4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