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행해지는 가짜들 #03

믿음으로 행하지는 가짜들 #03
(성도인가? 양아치인가? / 상식에도 못미치는 믿음=망상적 자기 확신)

한 번쯤은 들어봄직한 말들이 있다. ‘저 사람은 교회 다니지 않아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보다 나아’, ‘교회 다니는 사람도 다 똑같아’.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조금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나보다. 물론 한국의 초대교회의 성도들, 정말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경험해본 비신자들은 역시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르다라고 경험했을 것이고, 비신자들과는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비신자와 구분이 없어졌다. 교회를 다니던 다니지 않던 구분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더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아마 목회를 하고 있는 분들중에 내 교인도 아니고, 전혀 친분도 없는 사람들의 집에 방문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고작해야 내 교인의 집에 심방정도가 다 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심방이 아닌, 전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는 직업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여러 사람들의 일상을 보게 되고, 어떻게 사는지, 평소 모습은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만약 나에게 만나는 사람들 중에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하라고 하면, 정말 구분하기 어렵다. 현관문달려 있는 문패에 ‘XX교회’, 혹은 집안 달력에 ‘XX교회’이렇게 증명하지 않는 이상, 이 사람이 신자인지 비신자인지 알아볼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일상 속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듯이 신자와 비신자 구분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집에 방문했을 때였다. 그 집에 살고 계신 분은 너무나도 크게 유튜브로 찬양을 틀어놨다. 집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찬양들이 많이 흘러나왔다. 그 찬양을 틀어놓으신 분을 보기 전에는 이 집은 기독교의 냄새가 났고, 믿는자의 집과 같이 보이는 ‘교회 달력’이며, ‘십자가 모양의 악세사리’며 여러가지 증거들이 많이 보였다. 그러나 정작 그 집의 주인을 만났을 때는 믿는 자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말투’와 ‘행동’으로 다져저 있었다.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과, ‘믿는 자처럼 살아가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보이는 모습은 교회에 다니고, 기독교인의 냄새가 나더라도, 결정적으로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 칠한 무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외식’아니겠는가? 예쁘게 화장한 사람과 같이 겉으로는 ‘나이스하고, 믿음 좋아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클렌징을 하면, 화장에 가려졌는 민낯이 드러나듯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의 ‘믿음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다.

‘실제로 드러는 삶’의 모습이란, 자신이 결단하고 살아가고자하는 내재적인 의미보다는 실제로 상대에게 나타나는 행동을 이야기한다. 특히 ‘비정규직’이라던지, ‘사회적 약자’에게 대하는 매너만 엿보아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여기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Worker’ 나 ‘Helper’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내면 상태가 드러난다. 나의 삶 속에서 ‘직업’에 따라, ‘이력’에 따라, ‘나이, 인종, 국가’에따라 상대방의 대하는 태도에 차이를 보인다면, ‘믿음’은 둘째치고, 인간의 기본 수준에도 못미친다는 사실을 빨리 자각해야 한다. 이런 수준 이하의 태도와 생각을 가지고, 그 사람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위치로 간다면, 재앙과도 다를 바 없다.

수준이하의 매너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그보다 더 하나님께 누가 되고, 반영광이 되는 일이 있을까? 기본과 상실 이하의 수준을 가지고, ‘믿음의 삶’이니, ‘복음의 삶’이니 하는 모습을 주님이 보시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으실까?

‘양아치’라는 말은 원래 동냥아치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동냥하던 넝마주의나 거지들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양아치라 함은 동네 ‘삼류 만도 못하는 깡패’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즉, 삼류라는 것은 겉모습만 그럴싸할 뿐이지, 실력은 보잘 것 없다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는 ‘깡패’처럼 보이려고 애쓸지라도, 진짜 깡패 조무래기라도 만나면, 바로 꼬리를 내리는 것이 양아치 아닌가?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괴롭히는 것이 바로 양아치 아니겠는가?

‘사회적 강자’ 앞에서는 존중과 매너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사회적 약자’ 앞에서는 치졸한 양아치로 드러나는 성도의 삶이란 결국 복음을 거꾸러뜨리는 ‘역증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발 상식만이라도 가진 성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상식이하의 수준으로 ‘믿음’을 제발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믿음을 이야기하지 전에, 꼭 상식과 기본에 준하는지 스스로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주님이 주신 복음과 믿음은 상식 이하의 수준이 아니다. 상식과 수준을 뛰어 넘는 것이 ‘믿음’이다. 억지와 고집이 ‘믿음’이 아니라, ‘복음’앞에 나의 억지와 고집을 기꺼이 모두 포기하는 것이 ‘믿음’이다. 나는 이런 ‘완전한 복음’앞에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많이 보여지기를 바랄 뿐이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만이 건강한 교회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망상적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망상적 자기 확신’의 쉬운 말은 ‘똥고집’이다. 똥고집은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허황된 생각에서, 이치에 맞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렇게 믿는 것이다. 사실의 경험이나 논리에 의하여 정정되지 아니한 믿음이다. ‘나는 믿으니까 천국 간다.’, ‘나는 믿으니까 구원 받았다’, ‘교회 다니니까 믿는 것이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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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행해지는 가짜들 #04
(일을 하면, 예배 준비가 소홀해 진다고? / 목회자의 이중직 / 부캐를 원하지만, 할줄 아는 것이 없다… / N잡러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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